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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SIM - LITERATURE

에세이 소설

Sinking
in the
Deep Blue 

EDITOR

KIM HAESEO

첫사랑 (Sinking In The Deep Blue)

"편지 좀 부치고 올게요." 유모에게 말했다.

그녀는 며칠만에 듣는 내 목소리에 놀라 잠깐 입술을 달싹였으나 군말 없이 마저 식탁을 치워 나갔다. "네, 다녀오세요.”

빠르고 정확한 손동작 아래 접시와 나이프, 남은 빵 조각들이 꼼꼼하게 정리되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를 제대로 집어넣지도 않고 이 층으로 뛰어 올라가 내 방 옷장 문을 열었다. 여름이 끝난 건 아니었지만, 요즘 공기엔 가을이 스웨이드 가죽처럼 부드럽게 감겨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카디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편지. 그 사람에게 쓴 편지를 어떻게 챙길까 고민하다 치마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 쑤셔 넣고 급히 집을 나섰다.

담을 따라나서자 밀밭이 보인다. 밀밭 입구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꺾어져야 시내로 이어지지만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언덕을 오르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숲으로 향하는 골짜기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내가 생각도 없이 구두를 신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끼발가락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상태를 확인할 겨를이 없다. 오늘 안에 편지를 부쳐야 한다.

이윽고 나는 그 사람과 처음 만난 장소에 도착했다. 나무들이 신비로운 주렴처럼 호숫가를 따라 늘어져 있었다. 아직은 화사한 푸른 빛으로 넘실거린다.

그는 이 호수만 오면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곤 했다. 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을 때 봤던 진귀한 보석에 관한 얘기였다. 심해의 물을 가둔 듯한, 커다란 블루 사파이어 목걸이를 실제로 본 일은 그에게 일종의 훈장 같은 사건이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 목걸이의 주인이 배 위에서 몇 번이고 바뀐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을 좋아했다. 탐욕과 허영의 무게로 뻣뻣해진 흰 목덜미를 상상하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니까.

이야기에 몰입할 때 신이 날수록 짙어지는 그의 눈을 떠올리며,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잘게 찢어 물 위에 풀어놓았다.

받아들였다. 그날 밤, 그가 내게 입 맞춘 것은 나나 그의 약혼녀를 기만하기 위함은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틀렸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제 끝난 이야기니까. 혼란과 열정으로 얼굴을 붉힌 채 내게서 뒷걸음질 친 그 남자를 볼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 사실에 마음이 무너졌지만, 더 무너질 마음은 없다.

호수에 내려앉은 빛이 병아리 부리처럼 새침한 노란색으로 물들고 있다. 저녁이 오기 전에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어쩐지 내 처지가 억울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도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앓게 될 테니. 푸른 사파이어 이야기는 그에게 예전만큼의 흥미를 주지 못할 것이다. 찰나와 같던 여름밤의 입맞춤은 배 위에서 보낸 오랜 시간보다 긴 수명을 가질 것이기에. 그 입술에는 투명한 낙인이 새겨진 셈이다. 말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 때문에 혀를 달싹일 때마다 절망할 것이다. 뻣뻣한 혀. 모든 건 예전과 같을 수 없다.

호수는 찢어진 종잇조각들을 아이스크림 먹듯 해치운다. 나는 글자가 풀어지며 잉크가 녹는 것을 지켜보다가 되돌아간다. 쌀쌀해지는 듯하여 카디건을 걸쳤다. 천천히 걷자 발가락의 통증이 조금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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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해서  @unanswered.letters

Release - 2021.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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